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트 1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페르디난트 3세]]와 마리아 안나[* [[스페인 국왕]] [[펠리페 3세]]의 딸. 페르디난트와 안나는 서로 사촌이었다. 참고로 [[프랑스 국왕]] [[루이 14세]]는 펠리페 3세의 큰딸의 아들이니 이종사촌 형이다.]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. 원래는 형 [[페르디난트 4세]]가 제위를 계승할 예정이었기에, 어려서부터 [[가톨릭]] [[신학교]]로 들어가 종교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.[* 그렇다고 순수한 종교인은 아니다. 왕위 계승에서 밀린 유럽 왕실의 일원들은 이렇게 교회에 들어갔다가 이후 [[대주교]]나 [[추기경]]까지 올라가서 다른 의미로 권력을 가지게 된다. 일본의 다이묘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차남 이하는 승려가 되는게 관례였다. 이렇게 종교인이 된 귀족들은 사생아를 두기도 했다.] 레오폴트는 [[프랑스어]]를 싫어해 궁중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.[* 대표적인 사례가 [[사부아 공자 외젠]]을 처음 만났을때인데, [[이탈리아인|이탈리아 혈통]]이지만 프랑스에서 자란 외젠에게 [[이탈리아어]] 할줄 아냐 물어보고 그렇다고 답하니 그럼 이탈리아어로 말하자고 하였다.] 형 페르디난트 4세가 1654년 이른 나이에 [[천연두]]로 급사하면서 갑작스레 제위 계승을 준비하게 되었고, 뒤이어 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가 1657년에 죽으면서 얼떨결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지인 [[오스트리아 대공국]], [[보헤미아 왕국]], [[헝가리 왕국]], [[크로아티아 왕국]]을 물려받았고, [[신성 로마 제국 황제]]로 선출되었다. 만 18세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오른 데다, [[30년 전쟁]]으로 피폐해진 합스부르크 제국을 재건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. 거기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원한 원수, [[프랑스 왕국]]의 [[부르봉 왕조]]는 그의 제위계승을 방해하는 공작까지 펼쳤다. 프랑스의 재상이었던 [[쥘 마자랭]]이 [[바이에른 선제후국|바이에른]] [[선제후]] [[페르디난트 마리아]][* [[루이 14세]]의 아들인 [[그랑 도팽 루이]]의 장인이다. 프랑스는 이러한 것을 한 번 더 벌이는데 1690년대 [[요제프 1세]]를 로마왕으로 선출할 당시 바이에른을 포섭하고 팔츠 계승전쟁으로 [[팔츠 선제후국]]을 루이 14세의 동생 [[필리프 1세(오를레앙)|오를레앙 공작]]에게 내주려고 했다. 그러나 이는 바이에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. 여담으로 페르디난트 마리아의 아들 [[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]]은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 당시 장남이 [[스페인 국왕]]이 되지 못하자 왕이 되려는 욕구를 버리지 못해 프랑스를 믿고 레오폴트 1세에게 대들다가 [[블레넘 전투|블렌하임에서 털렸다]].]를 황제로 선출하려 했다. 결국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로부터 제위계승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조건으로 같은 [[압스부르고 왕조|합스부르크 왕가]]인 [[스페인]]에 대한 지원을 포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. 한 술 더 떠, 프랑스와 스페인 영토를 균등분할하기로 합의한 사실까지 탄로나면서[*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1670년에 분할계획을 세웠다. 이 계획에 의하면 프랑스가 저지대와 북아프리카, 남부 이탈리아, 나바라를 얻고 오스트리아가 아메리카와 스페인 본토, 북부 이탈리아를 얻는 것이었다고. 그러나 당시 레오폴트에게는 마리아 안토니아를 제외하고 후사가 없었지만 루이 14세에게는 후계자인 [[그랑 도팽 루이]]가 있어서 후일 자신이 모든 영토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 짐작한 루이 14세는 바이에른 선제후와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바이에른에게 주고 자신이 스페인과 부속 영토 전체를 차지하기로 하지만 이 계획은 바이에른 선제후가 반대하고 레오폴트가 후사를 얻음에 따라 유야무야 되었다.] 스페인에서의 감정이 크게 나빠졌다. 레오폴트는 그 대신 독일 제후들의 연합인 라인 연맹에 가담하였다. [[스웨덴 국왕]] [[칼 10세 구스타브]]가 폴란드 왕위를 노리던 [[트란실바니아 공국|에르데이 공국]]의 [[라코치 죄르지 2세]]와 짜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자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와 연합하여 대항하기도 했다. 거기다 영원한 숙적 프랑스는, 태양왕이라 불린 [[루이 14세]]의 통치하에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펼치면서 오스트리아와 잦은 충돌을 벌이게 되었고,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의 맹공으로 여러 차례 불리한 상황에 놓이곤 했다. 거기다가 프랑스가 '''이교도'''인 [[오스만 제국]]과 공수동맹까지 맺어, 오스만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세를 받았다. 1663년에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였을 때는 생고타르 전투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상 헝가리([[슬로바키아]]) 일대의 [[노베잠키|에르셰쿠이바르]]를 오스만 제국에게 내주면서 불리한 조건으로 향후 20년간 서로 침략하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었다. 이 때문에 [[크로아티아 왕국]]의 주요 귀족들인 즈린스키, 프랑코판 가문 등이 반발하여 그들을 가혹하게 처분했고 이러한 귀족 탄압이 원인이 되어 [[퇴쾨이 임레]]의 주도로 상 헝가리에서 봉기가 일어났다. 퇴쾨이 임레가 [[메흐메트 4세]]와 카라 무스타파 파샤에게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을 공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1683년 [[제2차 빈 공방전]]이 벌어졌고 레오폴트 1세는 일찌감치 빈을 포기하고 [[파사우]]로 피난을 떠났다. 다행히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의 국왕 [[얀 3세 소비에스키]]의 도움으로 위기는 벗어날 수 있었다. 그 후 뛰어난 장군인 [[사부아 공자 외젠]]의 활약으로 [[오스만 제국군]]을 몰아내면서 1699년 [[카를로비츠 조약]]을 맺어 [[오스만 헝가리]] 대부분과 에르데이 공국을 되찾았고, 헝가리 의회로부터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세습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.[* 더 정확히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만 헝가리 왕위 후보자로 출마할 수 있도록 계승법을 바꾸었다. 통념과 달리 [[헝가리 왕국]]과 [[보헤미아 왕국]]은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이 붕괴될 때까지 선출제를 유지했다.] 하지만 1697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낼 때는 [[슈트라스부르크]]를 프랑스에 양도했다.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Benjamin_von_Block_001.jpg|width=100%]]}}} || || 레오폴트 1세, 벤야민 폰 블로크(Benjamin von Block) 작, 1672년 || 잦은 전쟁으로 파탄난 재정을 메꾸기 위해 [[헝가리 왕국]]을 착취하는 한편 대외전쟁에서 독일 제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보니 이들에게 저자세로 나가며 우대책을 써야하기도 했다. 1663년에는 [[제국의회(신성 로마 제국)|제국의회]]가 해산되고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가 새로 만들어졌다. 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이 [[하노버 왕국|하노버]] [[선제후]]가 되었다.[* 자신의 아들인 [[요제프 1세]]와 [[카를 6세]]를 신교도 가문인 [[벨프 가문]]의 공녀들과 결혼시켰는데, 이 가문이 선제후가 됨에 따라 동맹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. 여담이지만 뤼네부르크계는 훗날 영국 왕실이 되는 [[하노버 왕조]]이고 볼펜뷔텐계는 주로 [[프로이센 왕국]]과의 연관성이 깊은데 [[나폴레옹 전쟁]] 당시의 프로이센 원수인 페르디난트 공작이 볼펜뷔텐계의 수장이었다. 거기다가 [[프리드리히 대왕]]의 왕비 역시도 이 가문 출신이다.] 이는 안 그래도 결속력이 약한 신성 로마 제국에 큰 타격이었다. 이 와중에 [[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|브란덴부르크]] 선제후에게 왕의 지위를 내려 [[프로이센 왕국]]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는데[* 신성 로마 제국에서 왕의 지위는 제위 계승 후보인 [[독일왕]]과 선제후인 보헤미아 왕밖에 없었기 때문에 본토인 브란덴부르크는 [[변경백]]-[[선제후]]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폴란드-리투아니아의 형식적인 봉신국이었다가 독립한 [[프로이센 공국]]의 이름을 빌려 왕으로 승격시켰다. 따라서 프로이센의 왕(König von Preußen)이 아닌 프로이센'''에서의''' 왕(König in Preußen)으로 칭했다. 동양으로 비유하면 [[외왕내제]]와 비슷하다.],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|반 세기 후에 일어난 일]]을 생각한다면 실책으로 비춰질 수 있다. 그러나 사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상당히 있는 부분인데, 당시 [[합스부르크 제국]]에게 최대의 적은 [[프랑스 왕국]]과 [[오스만 제국]]이었기 때문이다. 특히 프랑스는 당시 유럽의 인구대국으로 국력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밀리지 않는 [[강대국]]이었다. 그러다보니 프랑스를 확실히 막아야 하는 레오폴트 입장에서는 자신을 제대로 지지해줄 세력이 하나라도 더 필요했다.[* 당장 자기 손녀인 [[마리아 테레지아]] 조차도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 당시 프랑스-[[스페인]]이 신성 로마 제국 내의 프로이센, [[바이에른 선제후국]], [[팔츠 선제후국]], [[작센 선제후국]]과 연합했고 [[슐레지엔]]을 프로이센에게 떼어 준 후에야 해결되었음을 생각해보자.] 레오폴트 1세로서는 [[프리드리히 대왕]]의 등장이라는 미래의 변수를 예상할 수도 없었고, 무엇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원인은 [[카를 6세]]가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지, 레오폴트 1세가 이에 직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. 실제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[[프리드리히 1세(프로이센)|프리드리히 3세]]를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은 황제 선거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경향이 강했고, 그는 왕이 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에 파병을 해야 했으며 칭호 역시도 König in Preußen, 즉 프로이센 안에서는 왕이라는 조금 격이 낮은 칭호를 써야 했다. 그걸로 부족해 철저한 가톨릭 국가답게 [[개신교|신교]]에 대한 탄압에 더더욱 박차를 가해서 상공업의 발전도 지지부진했다. 특히 오스트리아의 상공인 계층은 개신교 신자가 많았기에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죄다 프랑스[* [[낭트 칙령]]이 폐지된 건 1685년이라 그때까진 프랑스는 개신교를 차별하지 않았기에 주로 프랑스로 도피했다.]와 [[네덜란드 공화국|네덜란드]] 등지[* 프랑스가 [[위그노]] 학살을 할 때부터 전통적인 종교적 망명의 땅으로 인식되었다.]로 빠져나가게 되었다. 그나마 합스부르크 제국의 불세출의 명장인 [[사부아 공자 외젠]] 덕분에 여러 차례 위기를 넘기고 오히려 [[대튀르크 전쟁]]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[[페르디난트 1세]]가 헝가리 왕위를 승계한 이래 150년 동안 분열되었던 헝가리 전역을 재통합하는데 성공했다.[* 다만 오늘날의 [[티미쇼아라]]를 중심으로 하는 바나트(Banat) 지역은 둘째 아들 카를 6세가 수복했다.] 말년에는 자신이 버리다시피 한 스페인 왕위가 프랑스의 [[부르봉 왕조]]에 간다는 사실에 스페인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닫고[* 사실 스페인 왕위는 별 관심 없었고 스페인이 보유한 [[밀라노 공국]], [[나폴리 왕국]], [[시칠리아 왕국]] 등 이탈리아 영토에 더 관심이 많았다. 실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 전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제국이 체결한 밀약의 쟁점은 스페인령 이탈리아 영토였지 스페인 왕위 자체는 후순위였다.]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에 개입하여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으나 전쟁 중인 1705년에 64세의 나이로 죽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